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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1. 10:39

PiFan,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 인터뷰

지난 주말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PiFan, Puchon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에 있었네요.
이유는 다름이 아닌 건담이죠.
PiFan의 '아시아 제작 배급사 회고전: 선라이즈 기동전사 건담, 우주세기의 기억'이라는 코너로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1, 2, 3편, 기동전사 제타 건담 극장판 1, 2, 3편,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기동전사 건담 UC(유니콘)을 상영했거든요.

17일부터 18일까지 주말 동안에 저 순서대로 상영을 했습니다(작품 제작 순서가 아니고 건담 세계의 시간 순서를 따랐네요).
그리고 재상영도 예정되어 있으니 관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상영을 놓치신 분은 ☞시간표☜ 체크하시고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걸 이틀 동안 연달아 보기엔 체력과 시간이 뒷받침해주지 않아서 저는 퍼스트 건담은 패스하고 제타 극장판부터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타 극장판 3부작은 무려 17일 밤에 시작해서 18일 아침에 끝나는 살인적인 스케줄이었어요.

그래서 17일 낮에 오지 않는 잠을 이리저리 땡겨서 자고 저녁 때 부천으로 떠났습니다.
완전 초행길인데 비도 퍼붓듯이 내리고 내비는 PiFan 행사장이 고속도로 출구(중동 IC)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 출구를 두 개나 미리 내리라고(시흥IC) 해서 앞은 잘 보이지도 않는 지방도와 시내도로를 한참을 달렸습니다ㅜㅜ.

천신만고 끝에 부천에 도착해서 chaoskoo 님과 인사하고 부천시청에 있는 상영관에 입장을 했는데...
밤 11시부터 기동전사 건담의 감독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 씨와 인터뷰가 있다고 합니다.


토미노옹의 거만하고 괴퍅하고 독선적인 언행은 익히 들은 바가 있고,
'이런 영화제에서 준비한 인터뷰에 건담 팬이 건질 만한 내용이 뭐 있겠나, 그냥 수박 겉 핥기 식이겠지'하는 생각으로
별 기대 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상당히 새롭고 재밌데요.
토미노 옹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는 것은 보통 인터뷰와 같았으나, 이 질문들이 PiFan 측에서 맘대로 정한 게 아니고
질문 후보군 몇십개를 놓고 팬들에게 스티커 투표를 시켜서 그 중에서 12개 정도를 엄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 진행자인 권용민씨나 통역하시는 분(성함이 잘...-_-)도 진행과 통역을 무리 없이 매끄럽게 잘 하시더군요.
권용민 씨는 PiFan 프로그래머라는데, 이 프로그래머가 소스 코드 짜는 그런 의미 같지는 않고 행사 계획, 진행 같은 걸 하는 사람 아닐까 싶네요.
통역은 사실... 예를 들면 '아'라는 한국말 질문을 '어'라고 물어보는 실수가 왕왕 있었던 것 같은데...
토미노 씨의 '어' 질문에 대한 대답도 흥미로웠고, 토미노 옹의 말씀을 한국어로 통역하는 건 잘 하셨기 때문에 크게 불만은 없습니다^^.

인터뷰 때의 질문과 답변을 정리해봤습니다.
들으면서 적느라 잘못 듣거나 놓친 부분이 좀 있을 겁니다. 혹시 아시는 분은 지적 부탁 드립니다.


1. 감독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MS와 애착이 가는 MS는 무엇인가요?
나이가 나이고 MS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이름 다 까먹었습니다. 그래서 다 좋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군요.
가장 애착이 가는 건 돔(MS-09)입니다. 제가 그린 삼면도를 바탕으로 오오가와라씨(건담의 디자이너)가 완성한 거라서 제 맘대로 좋아합니다.

2. 감독님 이외 사람의 건담 작품 중 좋아하는 것과 용서가 안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건담을 만든, 말하자면 부모 같은 사람이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저로서는 그런 것을 보는 것은 매우 괴롭습니다. 그렇지만 건담의 저작권을 제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건담 작품을 보지 않았고, 그래서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없습니다.

3. 감독님 작품 중 이것은 꼭 봐라는 것과 이건 보지 말아달라는 걸 골라주십시오.
제가 그런 답을 할 수 있다면 작품을 만들어 공개하지 않았겠죠.
어차피 이미 공개되어 있는 작품들이고, 작품이 재미 없으면 제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런것이니
보시는 분들 맘대로 알아서 보고 판단해 주세요.

4. 제타건담 극장판 엔딩이 TV판에 비해 좀더 희망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는데요.
어차피 픽션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TV판 이후 극장판이 나오기까지 20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동안 세상도 달라지고, 저도 바뀌고, 건담도 달라졌죠.
영화로서의 간결성을 위해 변경했습니다.
한가지 알아두실 건 프로 크리에이터에게 이미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건 매우매우 괴로운 일이란 겁니다.


5. 요즘 건담이나 다른 작품들은 예전 건담에 비해 전쟁을 가볍게 보고 있는 듯한데요.
전쟁도 모르고 군대도 없는 세대기 때문에 전쟁을 일종의 게임처럼 생각하고 그리게 된 듯합니다.
애니메이터들은 영상적으로 예쁜 것만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전쟁의 고통이나 상처까지 아름답게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폭발 장면 같은 것도 멋지고 아름답게 그리는데, 그 안의 죽음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6.
요즘 인터넷 상에서 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작품을 통해 느껴줬으면 하는 게 있으신가요?
저는 인터넷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인터넷 사용자들이 시야가 좁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에 글을 써서 내 의견을 알리고 싶다는 충동이 강한 사람은 시야가 매우 좁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쓰는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기 쉽지만 극히 일부의 의견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 전혀 걱정을 안 하고있고, 앞으로 모든 사람이 인터넷에 익숙해지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많은 작품들을 통해 일관되게 전해 온 메시지가 있습니다. '손으로 쓴 문장이 가장 중요한 데이터'라는 거죠.

7.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만 좋아하고 다른 작품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우주세기 vs. 비우주세기)?
그런 행동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호불호가 극명한 사람이라서...
다만, 나이가 들고 보니... 내가 싫더라도 다른 사람 100명이 인정하는 작품이라면 관심 가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 되네요.

8. 작품의 주인공 젊은이들과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전 요즘 젊은이들은 전혀 모르겠습니다.
알고 싶다고는 생각하지만 겪어온 것이 다르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세대차이 때문이죠.
질문에 답변을 못 드리겠네요.

9. 로봇물을 많이 제작하셨는데, 다른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는지?
저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은 애니메이션 비즈니스의 일개 스탭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스탭으로서 누가 어떤 걸 만들어 달라고 제안한다면 만들겠지만 제가 만들고 싶은 건 없습니다.

10. 건담을 보면 전쟁만 계속되는데, 인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계신가요?
그런 것밖에 만들지 못하는 인간이 만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애니는 어린이들이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세대에서는 전쟁 얘기만 했지만 다음 세대 작품들이 아이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면 좋겠습니다.
퍼스트 건담은 '어른들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애니를 만들자'는 동기로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린이들이 이해하고 감동 받을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진정으로 어른들도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깨달았습니다.

11. 감독님의 인터뷰 중에 어떤 작품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지금 기억 나는 작품은 어떤게 있나요?
숫자가 너무 많고, 건담과 관련 없는 질문이라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스티커 투표로 선정된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고, 그 이후로는 티켓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관객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1.
감독님 작품 중에 기회가 되면 리메이크하고 싶으신 작품은 어떤 것일까요?
없습니다.

2.
건담을 왜 만드셨나요?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죠. 그게 프로입니다. 제가 좋아서 한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3.
감독님의 신작 링 오브 건담에 대해서 얘기해주시죠.
작년에 시작품을 만들었는데, 출자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현재 프로젝트 중지 중입니다.

4.
한국과 관객들의 인상은 어떠신가요?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지 않습니까? 인사치레를 하자면 한국 정말 좋아합니다.


5.
MS를 타는 캐릭터를 통해 표현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이셨나요?
MS는 인간형이라서 포즈를 통해 탑승자의 감정 표현이 가능하죠.
여러 작품을 작업하면서 출자자들이나 저나 인간형 로봇의 이런 편리한 장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대 로봇의 포즈를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는 점 때문에 영화적으로는 강렬한 이야기밖에 다룰 수 없다는 제약이 생겼고,
결국 전쟁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던 겁니다.
MS라는 물리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는 탑승자 이외의 강한 등장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권력자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미노 감독에게 한 말씀 부탁 드렸습니다.
"건담이 벌써 31년을 맞이했는데요. 다음 세대 어린이들에게 좀 더 좋은 건담적인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한 60년 정도 사랑해 주세요."
이 말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토미노 감독이 처음 등장할 때도 한 차례 기립박수가 있었고, 매 질문의 답변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군요.


제가 지금까지 토미노 감독의 언행에 대해 들어왔던 정보는 사실 말투 따위는 나타나지 않는 축약본 성격이었고,
제가 정리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도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한 마디로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건방지고 독선적이고 괴퍅한 말인데,
이걸 실제로 옆에서 들어 보니 그런 거부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놀란 것이... 엄청나게 건방진 내용을 상당히 공손한 태도로 말하는 겁니다!!
뭐, 일본인 특유의 몸에 밴 습관이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저는 ZZ건담이나 V건담 같은 토미노 감독의 작품보다는 오히려 건담이 멋지게 나오는 0083이나 SEED나 유니콘을 더 좋아하는 '건담 팬'의 입장이라서 자기 작품 이외의 건담을 비하하는 듯한 토미노 감독을 경원시해온 것이 사실입니다만...
토미노 감독이 11번 질문의 답변을 하는 도중에 이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전 건담 팬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만든 건담 외엔 모릅니다."

뭔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분명히 그는 건담 팬이 아닌데, 건담 팬인 저와 같은 느낌으로 건담을 대해주길 바랬고, 제 기대에 어긋나자 맘에 안 들어 한 겁니다.
마치 어떤 수퍼스타의 아버지가 그 아들을 막 대하는 걸 보고 분노를 느끼는 팬 같은 유치한 감정이었죠.

어쨌든 건담은 그것을 낳아준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잘 자라서 많은 새끼도 치고 있고,
원래의 기원이었던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보다는 캐릭터 상품 사업이 메인이 되어버리는 등 성격도 많이 바뀌어버렸는데요.
좋아서 낳았든 출자자들에게 당해서 원치 않게 낳았든지 간에 건담을 최초로 낳아준 아버지인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존중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고 탑처럼 쌓인 건프라와 건담 디 오리진 만화책 번역본 전집 등 호화로운 경품 추첨이 있었고 (제 바로 뒷자리에 있던 사람이 당첨 됐는데, 매우 안타깝...) 밤샘 영화 보느라 배고플 사람들에게 팝콘 치킨과 콜라를 나눠주더군요.
좀 식고 김 빠진 감이 없진 않았지만 공짜로 주는 거라 맛있게 먹었습니다.
일단 배 부르고 나니깐 기분이 좋네요. PiFan 좋아요!!

밤샘 영화를 보고 오전에 집에서 한 잠 잔 후 오후에 부천에 복귀해서 영화를 또 봤습니다.
역습의 샤아와 유니콘 건담을 연달아 봤네요.
chaoskoo님과 승순님, 그리고 다른 분들과 함께 봤습니다.


이미 집에서 다 봤던 영화들이었지만,
큰 화면, 좀더 나은 음향으로 봤다는 사실과 더불어
건담 팬들과 함께 보았다는 사실이 나름 재미있고 뿌듯했습니다.
영화 끝날 때마다 박수치는 것도 느낌이 좋았고, 영화 도중에 주위에서 속닥거리는 오타쿠스런 대화들도 과히 싫지 않더군요^^.

그리고 건담 작품을 상영하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로비에는 극장판 포스터, 우주세기 그림 연표 비슷한 것, 건프라 킷 등이 전시되어 있고,
민봉기의 건프라월드 운영진들의 작품도 진열되어 있습니다(사진기를 안 갖고 가서 폰카로-_-).




올 해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는 수도권 거주 건담 팬이라면 한 번 와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작년까지는 PiFan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올해 처음 와봐서 건담전에 꽤 좋은 인상을 받았고요.
어쩌면 내년 이후로도 흥미로운 작품이 걸린다면 또 와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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