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6. 02:07

건프라 사진 강좌 #0 - 캐릭터 모형 사진 어떻게 찍을까?

저는 프라모델은 고딩 때(대략 1990년) 이후로 손을 놓았다가 2007년말부터 다시 건프라에 손을 대게 되었고요, 그 이전 몇년 동안은 사진이 취미였습니다.
뭘 감추겠습니까? Velvio라는 닉네임은 Velvia라는 사진필름 이름에서 따왔답니다.

그러다 보니 건프라를 만드는 것뿐 아니라 건프라를 사진으로 찍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건프라 만드시는 분들 중에는 사진을 조금만 공부해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상식적인 테크닉들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작품이 가진 매력의 반의 반도 사진 상에 표현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셔서 안타깝더라고요.
물론 건프라 취미 본연의 재미는 조립과 도색, 그리고 실물 전시이겠지만 역시 요즘 세상에 사람들이 내 작업의 결과물을 접하게 되는 가장 보편적인 경우는 웹에 올린 사진을 통해서 아닐까요?
모형 생활에 있어서 사진 촬영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는 그래서 2007년에 건프라를 다시 손에 잡았을 때부터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사진 테크닉 강좌 글을 써보리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렇지만 몇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서 이걸 실행에 옮기지 못해왔죠.

건프라 잘 만들지도 못하면서 무슨 건프라 사진에 대해 논하느냐,
남을 가르칠 정도의 사진 전문가도 아니지 않느냐 등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도대체 건프라 사진의 본질은 무엇이고, 왜 찍는 것이고, 추구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 속에서 정리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스타워즈 EP2, 우주전쟁, 스피드 레이서, GI Joe 등의 영화에 Pre-Visualization Artist로 참여하신
이의성(노타입)님의 블로그 '플라팬'을 최근에 발견했고, 거기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플라팬에서는 '건프라를 실물 건담처럼 보이게 촬영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고,
아무래도 그쪽 방면의 전문가께서 쓰신 것이다 보니 내용의 완성도가 무척이나 높습니다.
알고 보니 건프라 세계에선 꽤 알려진 블로그였는데 제가 뒤늦게 이제야 발견했던 거였더군요.

<플라팬 블로그에는 대략 이런 후덜덜한 사진을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플라팬에 이미 완성도 높은 건프라 촬영 강좌가 정리되어 있다면 링크만 걸면 되지 뭐하러 강좌를 또 쓰느냐?
예, 그것도 좀 고민했습니다만...

노타입님의 주된 타겟은 '건프라를 실물처럼 보이게 촬영하는 방법에 대한 프로페셔널한 내용'이라면
저는 '건프라를 멋지고 돋보이게 촬영하는 방법에 대한 초보자를 위한 강좌'를 목표로 강좌를 새로 하나 더 써도 괜찮지 않을까요?


1. 건프라란 무엇인가?

건프라 사진 촬영을 논하기에 앞서 건프라의 본질에 대해 다소 철학적인 고찰을 해 보도록 합시다.
플라팬 블로그의 곳곳에서 얘기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한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건프라'라는 것은 모순과 역설의 덩어리입니다.

1) 모형이라는 존재의 역설
모형(Model)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 자체의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답지 않아야 더 훌륭한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즉, 모형은 모형 티가 팍팍 날수록 가치가 낮고,
모형스럽지 않고 모사하고자 하는 원형 실체의 모습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모델러가 접합선 수정을 하고, 골다공증을 메꾸고, 도색을 하고, 디테일 업을 해주고, 디오라마를 꾸미는 것도
플라스틱 모형 티가 안 나게, 원래의 실체와 흡사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고요.

모형 사진을 찍을 때도 '이것이 모형이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사진을 찍을 것인지',
아니면 '마치 모형이 아니라 원형 실체인 것처럼 보이도록 찍어줄 것인지' 같은 갈등이 생깁니다.

2) 캐릭터 모형의 역설
모형이란 것은 원형의 실체를 사실적으로 비슷하게 모사할수록 훌륭한 것이라고 했는데,
건프라나 미소녀 피겨 같은 캐릭터 모형의 원초적인 문제는 원형이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1> '원형에 충실하다'는 것과 '사실적이다'는 것이 서로 상충될 수 있다.
2> 통일된 기준 원형이 없고 제작자의 취향에 따라 모형의 형태가 제각각이 된다.
는 문제들이 생깁니다.

<marswolf님의 1/8 아키야마 미오 - 학원제 작품입니다>


위 사진에서 베이스 기타나 마이크 스탠드는 원형이 되는 실물의 베이스나 스탠드 형태를 상당히 그럴 듯하게 잘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얼굴이 저렇게 생긴 사람은 현실 세계에 존재할 리가 없겠죠?

아키야마 미오는 케이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세계 내에서는 분명히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애니의 과장된 2차원 캐릭터 원형과 최대한 비슷하게 모형을 만들려고 하면 인간의 사실적인 형상은 포기할 수밖에 없고,
최대한 실제 인간처럼 만들려고 하면 케이온!의 아키야마 미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 피겨의 머리 크기라든가 몸매(프로포션)는 애니에 등장하는 아키야마 미오와는 좀 다릅니다.
피겨 제작자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형태로 리어레인지된 것이죠.

건프라도 대략 비슷한 문제점들에 부닥치게 됩니다.
'건담'들은 건담 세계에선 대략 20m 정도 크기의 병기입니다만,
현실 세계의 20m 크기의 병기라면 애니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밍숭밍숭한 형태일 수도 없고,
그렇게 채도가 높은 알록달록한 색깔이어도 안 됩니다.

그런 이유로 모델러들은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표면에 패널라인을 추가하기도 하고, 좀더 세밀한 부품으로 디테일업을 하기도 하고, 웨더링을 하기도 합니다(색깔은... 거의 건담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실제 병기처럼 바꾸시는 분이 많지는 않죠).
가장 널리 알려진 사실적인 건담 모형이라면 작년에 오다이바에 세워졌던 1:1 퍼스트 건담 모형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애니판 건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디테일 몰드와 패널라인과 리벳과 마킹들이 박혀있습니다.

<왼쪽부터 MG 건담 Ver. 2.0, 오다이바 1:1 건담 모형, MG 건담 Ver. One Year War 0079>


역설적인 것은 취향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오다이바의 건담 모형이 사실적이고 더 좋은 모형이라고 할 수도 있고,
기동전사 건담 애니에 나왔던 맹숭맹숭한 형태를 최대한 재현한 MG 건담 2.0이 더 좋은 모형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저런 디테일이나 프로포션 같은 것도 통일되지 않고, 유행도 타고, 그야말로 만드는 사람 맘입니다.
오다이바 건담과 MG 건담 One Year War 0079 버전(속칭 페담)도 둘 다 패널라인이 복잡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패널 라인 위치와 모양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프로포션도 다르고, 컬러도 다르죠.

3) 인간의 형태를 가진다는 것
이건 건프라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 형태'에 집착하는 인간 두뇌의 본능적인 시각 인식 과정이 문제죠.
사람의 두뇌는 인간 형태를 가진 것을 매우 선호하고, 인간형 물체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처럼 인식해버립니다.

애초부터 전투병기가 인간형으로 생겨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의 주인공 메카닉이 인간형으로 생기면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시청자들이 훨씬 좋아한다는 이유로
건프라를 포함한 여러 로봇 캐릭터 모형들은 인간형이 되었습니다.
만약 건담류 MS들이 얼굴은 없고 팔다리가 네개씩 달렸다면 건프라 30주년 행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많이 팔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건프라의 '프로포션이 좋다', '포즈가 멋지다'라고 할 때 비교 기준이 되는 것은 당연히 인간의 프로포션과 인간의 포즈입니다.
건프라를 무의식적으로 인간처럼 보고 있다는 증거죠.

인간 형태가 건프라 사진에 미치는 영향으로는 우선
1> 사람의 시각은 인간형 로봇을 인간과 비슷한 크기일 것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인데요,
사진 속의 건프라를 거대한 실물로 상상하게 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2> 사람들이 건프라를 인간처럼 인식하니까 건프라 사진을 멋지게 찍기 위해 인물사진 촬영 테크닉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2. 건프라 사진, 왜, 어떻게 찍는가?

모델러의 입장에서 건프라 사진을 찍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작업한 작품이 이렇게 멋지고 대단하다!'는 것을 뽐내기 위함일 겁니다.

이런 목적과 위에서 말씀드린 건프라의 본질을 고려했을 때,
건프라 사진의 촬영방식은 대략 아래 표의 4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류법은 전혀 MECE하지도 않고 명칭도 그냥 제가 자의적으로 붙인 것이긴 합니다만...
노타입님의 경우 '현실감'의 높고 낮음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하셨는데, 살짝 따라해봤다고 할 수도 있죠^^.

방식 설명 목적 건프라를 보는 관점
제작기 사진 (제작중인) 건프라의 (일부만) 촬영 건프라 제품 리뷰, 개조/개수/도색 내용 설명 작업물, 그냥 모형일 뿐
정자세 사진 건프라의 직립 정자세를 촬영 소개, 전체적인 프로포션/컬러링/디테일의 확인 모형/실제, 인간형
액션 사진 액션 포즈를 취한 건프라를 촬영 역동적인 임팩트 있는 사진을 위해, 가동성 확인 모형/실제, 인간형
연출 사진 포토샵 등으로 실제상황처럼 연출 관람자에게 실제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최대한 모형이 아닌 실물처럼

<제작기 사진과 정자세 사진의 예>


<액션 사진과 연출 사진의 예>


고수 모델러들이 올리는 사진이나 모형잡지에 나오는 사진이나 건프라의 박스 아트를 보시면
대부분의 사진(그림)들이 위 표의 네 부류 중 한가지에 속한다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제작기 사진의 경우 사실 특별한 테크닉이 필요한 게 아니고 초점 맞춰서 흔들리지 않게 찍을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물론 사진 완전초보자분에겐 이것도 특별한 테크닉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출 사진, 혹은 합성 또는 시각효과 사진의 경우 액션 사진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정말 실물처럼 보이는 하이퀄리티의 연출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모형 제작단계부터 조명, 촬영, 포토샵 후작업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쉽지 않은 작업이 되므로 저는 패스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출/합성/시각효과 사진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노타입 님의 플라팬 블로그를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앞으로 주로 정자세 사진과 액션 사진에 초점을 맞춰서 건프라 작품의 매력을 100% 이상 최대한 뽑아낼 수 있게 사진을 찍는 방법에 대해 강좌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진들에서 건프라는 '내가 만든 모형의 퀄리티를 뽐낸다'는 관점에서 모형으로 볼 수도 있고,
또 어느 정도는 관람자가 마치 실물 건담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촬영하면 아무래도 모형처럼 느껴지게 찍히기 마련이죠(모형이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감상자로부터 다른 관점에서 감상할 수 있는 여지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저는 가급적 '사진 작업으로 인해 모형 티가 더 나는 일은 없도록' 촬영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습니다.


좀 급작스럽지만 0번째 강좌는 우선 이렇게 방향 제시만 하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번 글은 노타입님 블로그에 이미 나온 내용을 다시 쓴 것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내용이 너무 없긴 하네요.
'캐릭터 모형 사진 어떻게 찍을 것인가?'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말이죠.
어떻게 찍는지에 대한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은 다음번 포스트 '정자세 포징'부터 시작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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